고려시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대조영은 어떻게 시작하였을까?

마스터지 2025. 5. 4. 00:19

고구려의 계승자, 발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고구려의 후예’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나라가 떠오르시나요? 많은 분들이 고려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그 명맥을 이은 또 하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발해(渤海)입니다.
오늘은 고구려 멸망 후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던 발해의 탄생 과정을 자세히 소개해 드릴게요

발해(에듀넷)

고구려 멸망,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불씨

 

668년, 삼국의 하나였던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왕인 보장왕은 포로가 되었고, 수많은 고구려 백성들은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쪽 지역, 특히 압록강 상류와 만주 지역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었고, 그 중심에 바로 대조영(大祚榮)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발해영토(우리역사넷)

발해의 창건자, 대조영은 누구인가?

 

대조영은 고구려 귀족 출신으로, 무장(武將)이자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정확한 출신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서에서는 고구려 유민 또는 말갈계 혼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그는 항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독립을 도모했습니다. 그 시점이 7세기 말, 정확히는 698년이었습니다.

대조영(나무위키)

698년, 동모산에서의 시작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이라는 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진국은 후에 당나라에서 ‘발해’라고 부르게 됩니다.


‘발해’란 이름은 발해만 근처에 세워진 나라라는 의미로, 당이 외교적으로 붙인 이름이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름이 공식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국이라 여겼고, 내부에서는 자신들을 ‘고구려 사람’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발해(에듀넷)

당나라와의 갈등, 그리고 인정받는 독립국

 

발해는 당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자 했고, 이 때문에 건국 직후부터 당나라와 충돌했습니다. 특히 천문령 전투는 발해가 독립국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대조영은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하고 독립의지를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이후 당나라는 발해를 독립된 나라로 인정하게 됩니다.

당나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 진정한 ‘북국’

 

발해는 단순한 유민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건국 이후 빠르게 국력을 키우며 강대국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문왕(대흠무) 시대에는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바꾸고,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겨 당나라와 대등한 문명국가로 성장했습니다.

당과의 외교도 활발했으며, 일본, 신라와도 교류하며 동북아 질서에서 중요한 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일본은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부를 정도로 그 위상을 인정했죠.

 

발해는 왜 중요한가?

 

발해는 고구려의 정신과 문화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또한 말갈 등 주변 이민족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지금의 한국, 중국, 러시아가 만나는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에,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존했던 국가였습니다.

무엇보다 발해는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타오른 나라, 발해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 유민이 만든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은 패망한 조국의 혼을 잇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번성시킨 위대한 민족사적 성취입니다.
그 중심에는 대조영이라는 영웅이 있었고, 그의 노력으로 우리는 고구려의 명맥을 잇는 또 다른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