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고려 최악의 암군, 충혜왕

마스터지 2025. 7. 21. 00:26

패륜과 방탕의 끝, 고려 최악의 암군 충혜왕의 실체는?

 

고려 34대 왕 충혜왕(忠惠王)은 한국사 속에서 손꼽히는 ‘암군(暗君)’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두 차례 왕위에 오르는 드문 이력을 가졌지만, 재위 기간 동안 저지른 패륜, 방탕, 실정(失政)은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고려 왕실의 위엄마저 실추시켰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충혜왕의 출생부터 두 차례의 즉위, 그의 정치와 사생활, 그리고 최후와 역사적 평가까지 상세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왕이기에 그렇게까지 욕을 먹었을까?" 궁금하셨다면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시죠.

고려의 영토(한국문화원)

두 번 왕위에 오른 왕, 하지만 두 번 모두 실패

 

  • 이름: 왕정(王禎)
  • 몽골식 이름: 부다시리(普塔失里)
  • 출생~사망: 1315년 ~ 1344년
  • 부친: 충숙왕
  • 모친: 명덕태후 홍씨
  • 재위:
    • 1차: 1330~1332년
    • 2차: 1339~1344년

충혜왕은 고려-원나라 간섭기, 즉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시기에 왕위에 오른 군주입니다.
두 차례 왕위에 올랐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고, 결국 유배 도중 사망하는 비극적인 말로를 맞이하게 됩니다.

충혜왕 상상도

즉위와 정치적 배경: 아버지 양위로 왕위에 오르나

 

충혜왕은 1330년, 아버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즉위 2년 만에 원나라 정치의 변동과 본인의 악행으로 인해 1332년 폐위되고 말았죠.

이후 1339년, 충숙왕이 사망하자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여전히 원나라의 강한 간섭 하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했습니다.
즉, ‘왕’이라고는 해도 실질적인 자주권은 없던 시기였습니다.

 

암군의 실체: 방탕, 패륜, 그리고 실정

 

▷ 패륜과 성범죄

충혜왕의 가장 큰 문제는 도덕적 붕괴였습니다.

  • 계모, 왕실 여인 등과 부적절한 관계
  • 친족 여성에 대한 성범죄
  • 후궁이나 궁녀에 대한 폭력과 학대

이러한 패륜 행위는 고려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백성들 사이에서도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 사치와 향락

  • 국고를 탕진하며 주야장천 연회와 향락에 몰두
  • 각종 사치품 소비와 호화로운 건축 사업
  • 궁중 내 유흥 문화 확산

결국 이러한 사치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부담으로 이어졌습니다.

▷ 정치적 실정

  • 반대파 제거를 위한 측근 양성 및 권력 집중
  • 무리한 세금 인상, 토지·노비 강탈
  • 원나라에 대한 지나친 외교적 종속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라 주장했지만, 결국 정치적 불안정만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고통만 늘었습니다.

 

경제·사회 정책: 상업 진흥은 했지만,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충혜왕은 보흥고 등 국고 설치, 시장 내 점포 운영 허용, 포(布) 유통 활성화 등 상업 진흥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고려 후기에 접어들며 나타난 경제 구조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익의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의 사치에 소모되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정책들도 민생 안정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종교적 활동: 불교 진흥 시도, 그러나 빛을 잃다

 

충혜왕은 불교를 신봉하고 사찰 건립, 고승 후원 등을 통해 불교 진흥 정책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도덕적 실정이 심했기 때문에, 불교 활동마저 위선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불교 정책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졌고, 진정성 있는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최후와 사후 평가: “죽음을 슬퍼한 이는 없었다”

 

  • 1343년, 다시 원나라에 의해 폐위
  • 중국 남부로 유배되던 중 1344년 사망
  • 사망 당시, “죽음을 슬퍼한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 존재

그의 무덤은 개성에 위치한 ‘영릉(永陵)’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매우 냉혹합니다.

“충혜왕은 고려 역사상 가장 악명이 높은 왕 중 하나로, 방탕과 실정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충혜왕의 역사적 의미는?

 

충혜왕의 시대는 고려의 자주성 상실, 왕실의 타락, 민생 파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의 생애는 왕이 도덕성을 잃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교훈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 진흥과 국고 확대 등 일부 정책적 시도는 주목할 만한 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 앞에 ‘암군’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정치적 무능과 도덕적 붕괴가 너무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며

 

고려 충혜왕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왕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도덕성과 권력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지도자의 품격이 한 나라의 안위를 어떻게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적 반면교사입니다.

역사 속 ‘최악의 군주’라는 오명을 쓴 그이지만, 우리는 그 실패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충혜왕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 질문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