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남자, 비담의 정체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킨 사람
한국사에서 '최초의 여왕'으로 잘 알려진 선덕여왕. 그런데 정작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신하가 일으킨 반란의 한복판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바로 '비담의 난'입니다. 647년, 신라 최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이 "여자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선덕여왕은 이 반란이 진압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즉위하죠. 오늘은 이 사건의 주인공 비담이 대체 누구였는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신라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최대한 자세히 파헤쳐보려 합니다.

비담은 누구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비담이라는 인물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출생 연도도, 부모가 누구인지도, 젊은 시절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정확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서도 비담은 선덕여왕 재위 말기에 갑자기 등장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곧바로 처형당하는 인물로 그려질 뿐입니다.
다만 몇 가지는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됩니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년) 11월, 이찬(伊飡)이라는 관등에서 상대등(上大等)이라는 자리로 승진합니다. 상대등은 신라의 귀족회의인 화백회의를 이끄는 의장으로,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급, 혹은 그보다도 더 강력한 신라 최고위 관직이었습니다. 왕 아래에서는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비담의 정확한 출신 가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상대등이라는 자리 자체가 진골(眞骨) 신분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던 만큼, 비담 역시 진골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참고로 신라는 왕이 될 수 있는 최고 신분인 '성골(聖骨)'과, 그다음가는 신분인 '진골'로 골품제가 나뉘어 있었는데, 당시 성골 혈통의 남자가 모두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여성인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비담은 왕이 될 수는 없지만, 신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표면적인 이유
647년 정월(음력 1월), 상대등에 오른 지 약 1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비담은 염종(廉宗)이라는 또 다른 귀족과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때 내건 명분이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 풀이하면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고, 국내 정치 상황도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비담은 이런 혼란의 책임을 선덕여왕의 '여성 통치'로 돌리며 여왕 중심의 정치 체제 자체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강대국이었던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 "여자를 임금으로 세워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어, 비담이 이런 대외적 논리를 자신의 반란 명분으로 끌어왔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다? 학계의 다양한 해석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비담의 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상당히 갈린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명분이 과연 진심이었는지에 대해 여러 학설이 존재합니다.
1. 왕위 계승에 대한 불만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해석은, 이 반란이 단순히 '여왕 반대'가 아니라 '차기 왕위 계승'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선덕여왕은 병세가 매우 위중한 상태였고, 후계자로 사촌 동생인 김승만(훗날의 진덕여왕)이 사실상 정해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진덕여왕 역시 여성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비담의 구호는 선덕여왕 개인을 겨냥했다기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진덕여왕의 즉위를 막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성골 신분의 남자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진골 최고위직인 상대등 비담 스스로가 왕위를 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2. 김유신·김춘추 세력과의 권력 다툼설
또 다른 해석은 이 사건을 김유신·김춘추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과, 기존 진골 귀족 세력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선덕여왕 후반기,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인 동맹까지 맺으며 급속도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상대등이라는 전통적 귀족 세력의 정점에 있던 비담 입장에서는, 이들의 부상이 상당한 위협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골품제 내부의 파벌 갈등설
이 밖에도 특정 왕계에서 밀려난 세력이 일으킨 반(反)주류 운동으로 보는 시각, 화백회의에서 여왕 폐위 요구가 나오자 김유신 세력이 오히려 여왕을 옹립하며 갈등이 불거졌다는 정반대의 해석까지 다양한 학설이 공존합니다. 이처럼 1,300년도 더 지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의 정치적 맥락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반란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명분이 무엇이었든, 실제 전개 과정은 매우 급박했습니다.
비담과 염종은 군사를 모아 명활성(明活城)에 진을 쳤고, 선덕여왕을 지지하는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을 거점으로 삼아 맞섰습니다. 양측은 무려 10여 일에 걸쳐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반란군의 사기를 단숨에 끌어올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커다란 별똥별이 월성 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비담은 즉시 병사들에게 외쳤습니다.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를 흘리는 법이니, 이는 여왕이 패배할 징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반란군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 정도로 사기가 치솟았다고 전해집니다.
김유신의 기지, 전세를 뒤집다
바로 이 위기의 순간, 왕의 군대를 지휘하던 김유신이 나섭니다. 그는 길흉이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 하기 나름이라며 선덕여왕을 안심시킨 뒤, 상당히 대담한 계책을 씁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커다란 연에 매달아 밤하늘로 날려 보낸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어젯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김유신 측은 곧바로 "어젯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여기에 더해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까지 지내며 민심을 다잡았습니다.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는 다르며, 임금이 위에 있고 신하가 아래에 있는 것이 순리라는 논리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 심리전은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하늘의 징조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고 느낀 반란군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했고, 김유신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총공세를 펼쳐 반란군을 무너뜨렸습니다.

반란의 결말,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비담은 도망쳤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김유신에게 끝까지 쫓긴 끝에 결국 붙잡혀 처형당했고, 함께 반란을 도모했던 염종을 비롯해 관련자 30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비담의 구족(九族), 즉 그와 가까운 친족들까지 대거 숙청당했다고 전해질 만큼 그 처벌은 가혹했습니다. 반란이 일어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날짜를 살펴보면 더욱 극적입니다. 반란이 한창 진행 중이던 647년 음력 1월 8일, 선덕여왕은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자신을 겨냥한 반란이 진압되는 것조차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어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이 신라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합니다. 비담이 그토록 막으려 했던 '여왕의 시대'는 오히려 그의 죽음과 함께 한 번 더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비담과 염종 등 주모자들은 같은 해 1월 17일 최종적으로 처형되었습니다.
비담의 난이 신라 역사에 남긴 것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반란 하나가 진압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담의 난은 신라 정치 지형을 완전히 뒤바꾼 분기점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진골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비담이 몰락하면서, 반란 진압에 앞장섰던 김유신과 김춘추 세력이 신라 정계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이후 김춘추는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고, 그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잇는 '무열왕계'가 성립되면서 신라는 전제 왕권을 지향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비담의 난은 실패한 반란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권력 구조의 토대를 마련해준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다만 최근 학계에서는 이 사건의 서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도 나오고 있습니다. 김유신이 실제로는 반란 당시 중앙이 아닌 지방(압량주)에 군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직접 진압을 주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실질적인 진압의 주역은 이후 상대등에 오른 알천(閼川)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후대에 김유신의 활약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기록이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는 연구인 셈인데, 1,300여 년 전 사건임에도 여전히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마치며
비담의 난은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이기도 하지만, 정작 남아있는 실제 사료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짧은 기록 속에는 신라 왕실의 권력 다툼, 여성 군주에 대한 당대의 편견, 그리고 하늘의 징조를 이용한 심리전까지 굵직한 이야기들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비담의 외침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의 시대를 거치며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갔으니까요. 어쩌면 비담의 난은 실패한 반란이 아니라,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