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최무선, 화약으로 고려를 구하다

마스터지 2025. 7. 11. 00:24

한국 최초 군사발명가 ‘최무선’의 놀라운 이야기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고려 말, 누군가는 그 혼란의 시대를 기술로 돌파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최무선(崔茂宣)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무신이 아니었습니다.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기를 만들어내며, 세계 해전사 최초로 전함에 화포를 장착해 승리한 주인공이었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화약 아버지’라 불리는 최무선의 생애와 업적을 깊이 있게 조명해보려 합니다.
그의 도전은 단지 무기를 만드는 것을 넘어, 기술과 애국심, 미래를 향한 눈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최무선의 출생과 성장: 기술에 눈뜬 무신

 

최무선은 1325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영주(永州)이며, 아버지는 고려의 관리였던 최동순(崔東淳)입니다.

어려서부터 병법과 기술에 밝았고, 중국어에 능통해 다양한 서적을 탐독하며 지식을 쌓았습니다.
당시엔 매우 드문 ‘기술 지향형 무신’으로서,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 기술이 핵심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왜구의 침입과 화약에 대한 결심

 

14세기 후반,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 큰 위협이었습니다. 해안가 마을은 불타고, 중앙정부의 대응은 늦고 미약했습니다.

최무선은 전통 무기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합니다.
그는 당시 중국 원나라에서 비밀리에 보관되던 염초(질산칼륨)의 제조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기술자 이원(李元)에게 배워 화약 국산화에 성공합니다.

화약 국산화와 ‘화통도감’ 설치

 

  • 1376년(우왕 2년): 국내에서 화약 제조에 성공
  • 1377년(우왕 3년): 조정에 화약 및 화기 제조 관청 설치를 건의
  • 결국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되어 체계적인 군사 기술 연구 및 생산 체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기 제조가 아니라, 국가 기술력의 출발점이었고, 이후 조선의 군사과학 발전에 결정적 기틀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무기 개발, 그리고 진포대첩의 대승

 

최무선은 18종 이상의 화기와 무기를 개발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대형 화포
  • 화전(火箭): 불을 붙인 화살
  • 철령전, 질려포, 주화: 다양한 종류의 폭발성 무기
  • 로켓 무기까지 선보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의 기술력은 1380년 진포대첩에서 빛을 발합니다.

  • 왜구 약 500척의 함선이 진포로 침입
  • 최무선은 화포를 장착한 전함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
  • 세계 최초로 함선에 화포를 탑재한 해상전 승리로 기록

이 승리는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 군사기술사와 세계 해군사에 기록된 혁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후대에 이어진 기술과 유산

 

최무선의 군사기술은 그의 아들 최해산을 포함해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 임진왜란 등 국난 속에서도 화포는 조선군의 핵심 무기
  •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 발전과 병기 혁신에도 최무선의 유산이 반영

그는 죽은 후에도 정헌대부, 판군기시사, 검교문하부참찬문하부사, 그리고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증되며 기술관료이자 국방 영웅으로 예우 받았습니다.

 

최무선의 위대한 업적


업적 내용 및 의의
화약 국산화 중국 기술자에게 염초 제조법을 배워 국내 화약 생산 성공
화통도감 설치 국가 차원의 화약·화기 제조 관청 설립 주도
무기 개발 18종 이상의 화기 개발, 로켓 무기까지 선보임
진포대첩 승리 세계 최초 함선 화포 전투로 왜구 500척 대파
기술 계승 조선시대까지 군사기술 전통으로 이어짐
 

마무리하며

 

최무선은 단순히 무기를 만든 기술자가 아니라, “기술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한 개척자였습니다.
그의 도전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위기를 기술로 극복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노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