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에 의한 발해의 멸망과 그 이유, 발해의 역사적 의의 알아보기
발해의 멸망과 거란, 고대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짓다
발해는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한 광대한 영역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고대 국가였어요. 고구려의 멸망 후,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문화와 경제, 정치적으로 크게 번성했죠. 그러나 발해도 결국 거란족의 침략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요. 오늘은 발해의 멸망 과정과 거란의 역할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발해가 우리 역사인 근거에 대한 설민석 강사의 해설입니다.
발해의 시작과 성장, 고구려의 후예에서 해동성국으로
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가였어요.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역을 다시 통합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죠. 발해는 초기에는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외교적인 긴장과 갈등이 있었지만, 후에는 당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통해 문물과 기술을 교류하며 발전했습니다.
발해는 문화와 경제적 성장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수도 상경 용천부는 그 웅장함과 정교함으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연상케 했으며, 오경과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어요. 이러한 발전 덕분에 발해는 주변국들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란의 등장과 발해에 대한 위협
거란은 현재의 내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목 민족으로, 초기에는 여러 부족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했지만, 야율아보기라는 지도자의 등장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통합되기 시작했어요.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통합한 뒤, 요나라를 세워 발해와 고구려 옛 영토로의 팽창을 꾀했습니다.
거란은 발해와 인접한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며 발해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가중시켰어요.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말갈족과의 연합을 통해 주변을 방어해왔지만, 거란이 통합된 이후 발해의 방어선은 급격히 위태로워졌습니다. 특히 거란은 유목 민족의 기동성과 전투력을 앞세워 발해의 국경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략하고 약탈했죠.
발해의 내부 문제와 거란의 침공
발해는 외부의 위협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도 겪고 있었습니다.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정치적 혼란과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갈등이 커지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어요. 특히 귀족 간의 권력 다툼과 말갈족에 대한 억압이 심화되면서 내부의 결속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내부 문제들은 결국 외부의 적인 거란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926년,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 군대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발해는 210여 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어요. 발해의 멸망은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발해의 영토는 대부분 요나라에 흡수되었습니다.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들의 운명
발해가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유민들은 거란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일부 유민들은 거란에 의해 요나라의 지배 아래 편입되었고, 다른 일부는 고려로 망명하여 고려의 통치 아래 들어갔습니다. 고려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며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고려와 발해의 역사적 연관성을 반영하는 것이었어요.
발해의 왕족 출신 일부 인물들은 후발해라는 이름으로 거란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 세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발해의 멸망 이후 그 문화적 유산은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는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하려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 건국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
발해의 멸망 이후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요나라는 발해의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는 고려와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는 요나라와의 대립 속에서도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민족 통합을 추구했고, 이러한 정책은 고려가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통해 중국의 북부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지만, 그들의 통치 방식은 주로 유목 민족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었어요. 요나라는 중국의 농경 사회와는 다른 유목적 통치 방식을 유지했으며, 이는 한족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 속에서도 요나라는 일정 기간 동안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제 정세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어요.
발해와 거란의 역사적 의의
발해의 멸망과 거란의 부상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로서 동아시아에서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는 동북아시아의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했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문화는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어요.
반면 거란은 발해의 멸망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유목 국가로 부상하였으며, 요나라를 통해 한반도와 만주, 중국 북부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거란의 등장은 중국의 송나라와 고려, 그리고 여진족 등 주변 국가들과의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만들어내며, 이후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발해의 멸망 이후에도 그 유민들은 각지에서 발해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고, 이는 고려의 역사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고려는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민족적 연대를 강화하였고,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고려가 이후 몽골과 여진 등 강력한 외세에 맞서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의 멸망과 거란의 부상은 동아시아의 역사적 흐름을 크게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지만, 내부적 혼란과 외부적 위협 앞에 결국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어요. 반면 거란은 발해의 멸망을 발판으로 요나라를 건국하며 새로운 동아시아의 주역으로 부상했습니다.
발해의 멸망은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지만, 그 유산은 고려를 통해 계승되며 한반도의 역사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오늘날에도 발해의 역사와 거란의 부상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복잡한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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