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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최후의 군주, 보장왕은 정말 허수아비였을까?

마스터지 2025. 5. 19.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은 정말 힘없는 왕이였을까? 잊혀진 부흥의 의지를 되새기다

 

고구려 제28대 왕, 그리고 마지막 왕.
보장왕(寶藏王)이라는 이름은 역사 교과서에서 종종 ‘연개소문이 세운 허수아비 왕’으로 짧게 언급됩니다. 하지만 정말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고구려의 멸망을 지켜본 존재였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보장왕의 출신과 정치적 위치, 고구려의 마지막 시기, 그리고 그가 끝내 꿈꾸었던 부흥의 의지까지 깊이 있게 다뤄보려 합니다. 고구려 역사 속 가장 안타까운 인물 중 하나였던 그를 통해, 멸망의 순간에도 끈질기게 조국을 되살리려 했던 또 하나의 ‘인간적인’ 왕을 만나보세요.

보장왕 상상도

왕이지만 왕이 아니었던 사람, 보장왕의 출신과 즉위 배경

 

보장왕은 평원왕의 손자, 영류왕의 조카로, 본명은 고보장(高寶藏)입니다. 원래 왕위 계승 서열은 높지 않았으나,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그를 왕위에 앉히면서 고구려의 ‘허수아비 왕’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즉위는 했지만, 정권은 완전히 연개소문 일가가 장악하고 있었고, 그는 국정 운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귀족연립정권에서 독재체제로 전환되는 혼란기였고, 그 속에서 보장왕은 ‘이름뿐인 왕’으로 존재했던 것이죠.

연개소문 상상도

당과의 전쟁 속, 고구려의 마지막 발버둥

 

보장왕 재위 기간 중 고구려는 거의 끊임없이 당과 신라의 협공을 받아야 했습니다.

  • 645년, 당 태종의 대대적인 침공이 있었고
  • 이후 당 고종의 집요한 침략이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졌습니다.
  • 이 시기 보장왕은 사실상 연개소문과 그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들의 뒤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실권이 없었다고 해서 그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 그는 수많은 포로와 함께 당나라 장안으로 압송되었고, 당 고종 앞에서 직접 망국의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 고종(위키백과)

사면과 부흥의 꿈…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놀랍게도, 당은 그를 사면하고 ‘요동도독 조선왕’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옛 땅 요동 지역 통치를 맡깁니다. 이는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으로 고구려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던 당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내린 정치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보장왕은 숨겨둔 의지를 드러냅니다.

  • 말갈과 연합하여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려 했고 고구려 유민을 규합해 독립 왕국을 세우려는 시도를 감행합니다.

하지만 계획이 들통나며 그는 공주(지금의 중국 쓰촨성 충라이시)로 유배, 그곳에서 682년경 생을 마감합니다.

 

고구려 왕이 아닌, 조선왕으로 생을 마친 남자

 

그의 죽음 이후 당나라는 보장왕을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고, 시신을 장안으로 운구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의 무덤은 한때 돌궐을 지배했던 힐리가한의 묘 근처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지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당이 보장왕을 한낱 포로로만 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망국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끝까지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다시 보는 보장왕의 가치

 

보장왕은 보통 무기력한 인물, 꼭두각시 왕으로만 평가되지만, 그가 요동으로 돌아간 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고구려의 부활을 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를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 실권은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되살리고자 한 고구려인의 마음을 품고 있던 왕이었습니다.

 

마무리하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입니다.
보장왕은 패자의 길을 걸었지만, 멸망한 나라의 이름을 지우지 않으려 했던 마지막 수호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무력했던 허수아비 왕’이 아니라, 부흥을 꿈꿨던 끝까지 싸운 인물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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