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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조선시대 말기의 고종

    고종의 즉위와 수렴청정

    고종은 조선의 열다섯 번째 군주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즉위는 조선의 정치적 현실과 권력 갈등의 산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였으며, 철종 3725일에 태어났다. 조선 정치는 순조 이래로 최대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위세가 높았다. 그러나 안동 김씨 가문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흥선군은 그 화를 피하며 세도 가문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아들들을 길러냈다. 흥선군은 풍양 조씨 가문과 경쟁하던 안동 김씨 가문을 물리치기 위해 풍양 조씨 가문의 조대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고종은 철종이 승하하자 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고종의 어린 나이로 인해 실질적인 국정은 그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가 극심했고 안동 김씨 가문의 영향력이 컸다. 고종의 즉위는 아버지 흥성군과 조대비, 그리고 익종의 비인 조대비 사이의 정치적 밀약의 결과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는 사실상 권력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휘둘렀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신장시키는 한편 서구의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막아내겠다는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고종의 즉위 초기에는 권력은 사실상 흥선대원군의 손에 있었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는 안동 김씨 가문과의 경쟁이 치열했다. 안동 김씨 가문은 고종이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왕손들을 경계했으며, 흥선군은 자신의 자식들을 길러내며 권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또한 흥선군은 조대비와의 연결을 통해 풍양 조씨 가문과의 경쟁을 견제하려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수렴청정을 겪었으며, 그의 권력은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도 흥선대원군에게 의존해야 했다.

    고종의 사

    권한 강화와 개항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고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실권을 견제하고자 했던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대원군은 하야하고 친정이 선포되었다. 이후 일본의 침입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을 비롯한 일련의 불평등한 조약 체결은 국내적인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에 고종은 문명개화를 통해 국가 강화를 모색했으며, 국제정세에 대비하여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은 개항을 통해 조선의 국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문물의 섭취를 위해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일본과의 통상을 추진했다. 또한 외국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의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견지했다. 이러한 개항 정책은 조선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고, 외부세력의 간섭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고종의 왕권을 흔들어놓았다. 임오군란은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국내적인 불만을 일으켰다. 대원군은 개화정책 중단과 동학군 탄압을 시도했지만, 불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1884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다. 임오군란은 서인들의 항일운동과 동학군의 농민들이 함께 저항했다. 결국 대원군은 하야하고 권력을 포기하였으며, 갑신정변으로 이어졌다.

     

    갑신정변은 외국의 간섭과 일본의 영향력을 거부하려는 시도였다. 갑신정변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정부가 외국의 간섭에 저항하고자 할 때 나온 결과였다. 갑신정변은 궁중과 선조궁전의 수행원들이 외국인을 죽이는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외국인들은 청으로부터 조선 정부의 해결책을 요구했고, 청은 해결책으로 대원군을 조선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선조 궁중과 선조를 중심으로 한 수행원들이 외국인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고, 갑신정변이 발발하였다. 이후 갑신정변은 선조와 헌의 왕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왕권의 축소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일본의 개입은 고종의 왕권을 더욱 축소시켰다. 동학농민운동은 국내적인 불만을 일으키고, 대원군의 퇴위와 개화정책 중단을 초래했다. 일본의 개입은 강화도 조약을 비롯한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국제적 입지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고종의 왕권을 더욱 축소시키고, 외부세력의 간섭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고종은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외부세력의 압력과 국내적인 불안으로 인해 권력을 잃어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종은 왕권을 유지하는데 실패하였고, 그의 노력은 왕권의 축소로 이어졌다.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

    아관파천과 고종의 정치적 결단력

    고종은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미국과 러시아 등의 외국 세력을 활용했다. 이는 친일 성향의 인물들을 배척하고 친미친러적 성향의 인물들을 기용하여 일본의 세력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고종과 조선의 위기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을미사변과 고종의 감금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궁에 침입하여 왕후를 시해하고,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포로처럼 감금되었다. 을미사변 이후 조선은 반일적인 사회분위기를 악화시키고, 고종은 권력을 상실했다.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

    고종은 일본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는 조선에 침입하는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며, 고종은 광무로 새로운 연호를 채택하고 황제로서 즉위했다.

     

    대한제국의 권력 분산

    대한제국은 황제가 국정을 총람하는 전제황권국가였다. 고종은 입법, 사법, 행정은 물론 군통수권과 관리의 임면권, 외교권 등 모든 권력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권력 분산은 고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의 종망

    고종은 일본의 강요로 인해 강제퇴위하고,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종망하게 되었고, 고종은 권력을 상실하고 황태자 순종이 즉위하였다.

     

    결론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은 조선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고종의 결단력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과 외세의 압박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종망하게 되었고, 고종은 강제퇴위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근대화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 한 모습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종 관련 설민석 강의 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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