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 그의 생애는?
이완용의 성장과 관직 진출 과정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봉, 자는 경덕, 호는 일당이다. 어렸을 적부터 출신이 우봉 이씨라는 점이 그의 정계 입문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인 이석준은 대원군 집권 시기 호조판서를 지낸 판중추부사 이호준의 양자로, 이완용은 가문의 영향 아래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1882년(고종 19)에 이완용은 증광별시라는 경시 시험을 통해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했다. 그 후 승지와 주서를 거쳐 규장각대교와 검교, 홍문관수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는 등, 교육을 통해 외국과의 교류와 신학문 습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근대적인 사고와 학습은 미국으로 확장되었다. 1887년 주미특파전권공사를 따라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고, 이후 미국에서의 활동을 통해 친미개화파의 중요 인물로서의 지위를 강화했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 몇 차례 귀국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가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의 외교적 능력과 개혁적인 사고는 꾸준히 발전해 나갔다.
친미개화파로서의 활동
이완용은 친미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특히 갑오개혁 초기에는 박영효 등 친일개화파의 독주에 밀려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박정양 내각이 들어서면서 학부대신이 되어 친미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의 입장은 일본의 간섭을 막고,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개혁정권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근대적 초등교육기관 설립과 교육개혁 등을 추진하여 개화파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와 함께 성균관의 개혁과 외교적인 활동을 통해 친미개화파의 중심 인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실각하게 되었고, 이는 반일친미세력의 중심 인물로서의 입장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러일전쟁이후에 일본이 승리하자 기회를 틈타 친일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활동과 평가
이완용은 병합 이후에도 일본의 특별대우를 받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활발한 친일활동을 펼쳤다.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후작으로 승작하고 아들이 남작이 되는 등 조선인으로서는 최상의 지위를 누렸다. 이완용은 일본의 식민통치당국을 뒷받침하며 3·1운동을 비난하는 등 강력한 친일 행보를 보였다.
일본의 특별대우에 대한 보답으로 병합 이후에도 그는 일본의 정치적인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완용의 활동은 한국사회에서 극도로 적대적으로 대우되었으며, 그의 삶은 친일파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평가는 한국 역사에서 여러 해석과 갈등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행적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이완용의 사망에 대해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의 논설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그 괴로운 갚음은 영원한 진실임을 오늘 이 마당에서야 깨닫지 못하였스랴.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지! 앙탈하든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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