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설치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설치 배경 알아보기
오늘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설치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만큼 당시의 사건이 오늘날에도 주는 교훈이 많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럼, 함께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란?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충청남도 덕산군(지금의 예산군)에 위치한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입니다.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당시 조선과의 교역을 강제로 열기 위해 미국인 프레더릭 젠킨스(Frederick Jenkins)와 프랑스 신부인 페롱(Féron) 등과 함께 도굴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서양 국가들은 조선이 강력한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어 교역이나 선교 활동에 큰 제약을 받자, 조선 정부를 압박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유골을 훔쳐 흥선대원군을 협박하고 개항을 강요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는 조상을 숭배하는 풍습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대원군을 압박하려 했던 것입니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경과와 결과
1868년 4월, 오페르트 일행은 군함을 타고 충청남도 덕산에 상륙하여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묘지가 너무 단단히 만들어져 있었고, 또한 지역 주민들이 이들의 도굴 행위를 발견하여 격렬히 저항했기 때문에 오페르트 일행은 결국 도굴에 실패하고 도주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묘를 훼손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이자, 서양 열강의 무례함과 위협을 상징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정부는 서양 열강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졌으며,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만화로 표현한 영상입니다.
📌 흥선대원군, 척화비 설치의 배경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외국과의 모든 교류를 금지하며 더욱 엄격한 쇄국 정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조선 사회 내부적으로도 서양 열강의 위협과 침입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이었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1871년 전국 주요 지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됩니다. 척화비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고 화친(和親)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비석으로, 서양 열강과의 어떠한 협상이나 개방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조선 정부의 강력한 입장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척화비의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이 비석은 전국에 설치되어 서양 열강에 대한 강한 경계와 반감을 드러냈으며, 조선이 결코 개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표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척화비 설치의 의미와 영향
척화비 설치는 조선의 강력한 쇄국정책을 명확하게 표현한 사건으로,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강력한 쇄국정책의 지속: 서양 열강의 침략과 압박이 더욱 거세질수록, 조선 정부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쇄국정책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 외세 침입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식 고취: 척화비 설치는 전국적으로 반외세, 반개항 여론을 형성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국제적 고립의 심화: 결과적으로 외교적인 고립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이후 개항 과정에서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척화에 대한 의견입니다.
📌 역사적 교훈과 평가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척화비 설치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따른 자국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사건입니다. 당시 조선 정부의 쇄국 정책은 자국 보호를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동시에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지나치게 폐쇄적인 태도를 유지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받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외세의 침략적이고 무례한 태도가 오히려 국내의 반외세 정서를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조선의 역사적 흐름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마치며
역사는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그 사건을 통해 배우는 교훈과 깨달음을 제공해줍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척화비 설치를 통해 당시 조선이 겪었던 국제 정세의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선택들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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