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을 도와 정도전을 죽인 조선개국 일등공신 하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정치가 하륜
하륜(河倫)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가로, 그의 생애와 업적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하륜의 출생과 성장, 관직 생활, 왕조 교체 과정에서의 역할, 새로운 정치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 그리고 정치적 위기를 극복한 그의 인물평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출생과 가문
하륜은 1347년(충목왕 3)에 진주 하씨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호는 호정(浩亭), 자는 대림(大臨)입니다. 하륜의 선조들은 여러 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했으나 고위직으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진주 지역에서 토착세력으로 자리 잡은 하씨 가문은 하륜의 출사 이후로 그 위상이 점차 높아졌습니다.
가족 배경
- 부친: 순흥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潾)
- 모친: 진주 강씨
- 부인: 성산 이씨
하륜은 명문세족인 성산 이씨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더욱 높였습니다. 특히, 이인복(李仁復)의 중재로 하륜은 이인복의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인복, 이인임(李仁任), 이인민(李仁敏) 등과 처삼촌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맥은 하륜의 정치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1365년(공민왕 14)에 하륜은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며 그의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知貢擧) 이인복은 하륜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그의 혼인을 주선했습니다. 과거 급제 후 하륜은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맡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신돈(辛旽) 문객의 비행을 탄핵하면서 잠시 파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이 사망한 후 다시 지영주사(知榮州事)로 복직되었고, 중앙 정계로 소환되어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관직
- 고공좌랑(考功佐郞)
- 사헌지평(司憲持平)
-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 성균관사성(成均大司成)
- 밀직제학(密直提學)
하륜은 다양한 관직을 맡으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특히, 성균관사성으로서 교육과 학문 발전에도 기여한 바 큽니다.
하륜은 왜 정도전을 죽였나?에 대한 영상입니다.
우왕대의 정치 상황과 하륜의 유배
1380년(우왕 6)에 하륜은 모친상으로 인해 3년간 정계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후 1388년(우왕 14)에 이인임이 제거되기 전까지 꾸준히 관직생활을 이어갔으나, 이인임이 우왕대 내내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하륜도 그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습니다. 하륜의 묘지명에는 이러한 유배의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최영의 요동 공벌 주장에 반대하다가 양주로 추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위화도회군 이후 하륜은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왕조 교체의 기로에서
창왕의 즉위 후, 과전법 제정 등으로 정국은 더욱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하륜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왕환이라는 인물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일에 연루되면서 또 다시 유배에 처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륜은 광주로 유배되었으며, 이후 청주로도 유배되었다가 고향 진주로 보내졌습니다. 1391년(공양왕 3)에는 전라도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새 왕조의 개창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의 활동
1393년(태조 2)에는 경기좌도관찰사로 임명된 하륜은 천도, 표전 문제 등에 깊이 개입하였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는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계룡산 천도 관련 공사를 중지시키고 새 수도로 무악을 주장하는 등 천도 문제에 많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집권과 하륜의 역할
1398년(태조 7), 하륜이 충청도도관찰사로 임명된 직후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습니다. 하륜은 이방원에게 난을 진압할 것을 조언하고,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급히 달려와 군사를 내어 도왔습니다. 이 결과 이방원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정도전과 남은 등 많은 인사들이 제거되었습니다. 이후 하륜은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책봉되며 이방원의 집권을 도왔습니다.
정치체제 개편
하륜은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도평의사사 중심의 고려 관제를 의정부 체제로 개편하였으며, 삼군부의 기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편은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새로운 정치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
태종 즉위 후, 하륜은 정국을 주도하며 정치권력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가 수성을 위한 각종 체제를 구축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관제 개편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으며, 지방 통치 조직의 정비와 경제 재정 확충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경제 정책
- 사섬서(司贍署) 설치 및 저화(楮貨) 통용 추진
- 둔전(屯田), 조운(漕運), 개간(開墾) 등의 정책 시행
비록 저화 통용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하륜은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법전 및 족보 편찬
- 법전 개정
- 『고려사』 개수
-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등 왕실 족보 편찬
정치적 위기 극복과 인물평
태종은 정쟁을 통해 왕위에 올라 국왕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하륜은 태종의 정치적 동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동시에 공신으로서 견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411년(태종 11) 이색 비명 사건에서는 하륜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해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며 논란을 종결시켰습니다.
사후 평가
하륜은 1416년(태종 16)에 7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종은 하륜을 그 누구보다 가까운 정치적 동지로 회고하였으며, 세종은 그를 행정적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하륜의 업적과 영향력은 조선 초기 정치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륜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위기와 변혁의 시기를 거치며,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하륜의 노력과 헌신은 조선 초기의 안정과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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