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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약용의 가족과 어린 시절

    정약용은 해남 윤씨 출신의 외가와 국문학사 윤선도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정재원과 해남 윤씨로, 정약용은 176285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에서 5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차분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던 정약용은 천연두로 고생하면서도 눈썹이 3개인 듯한 얼굴에 대한 놀림에도 냉정하게 대처했다. 이런 성품은 그 후 그의 생애를 통해 계속되었다.

    1783, 정약용은 성균관 유생으로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정조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정조는 정약용을 매우 선호하며 자주 그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그러나 대과 시험에서는 미끄러지며 계속해서 불합격을 경험했다. 음모론에 의하면 남인 영수 채제공이 주최한 시험에서 정약용이 합격한 것은 남인 계열의 정약용이 나타나면 노론의 반발을 일으킬까 우려해 정조가 천천히 급제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1789, 정약용은 식년 문과에 갑과 2(아원)로 급제하였지만 가톨릭 교인으로 인해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0일만에 석방되어 수찬에서 정조의 화성 건설에 기여하였다. 이외에도 정약용은 수찬에서 기기도설 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 정약용의 고발과 활약

    1794,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찰사 서용보, 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정약용은 각종 비리와 불의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이 그에게 큰 계기가 되었는데, 서용보와의 관계가 정약용을 괴롭히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서용보는 그 후 44세의 나이에 우의정의 반열에 오르는 등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정약용을 괴롭혔다.

    3. 유배와 외가의 영향

    정약용은 정조의 사망 이후 18013월 신유박해로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노론은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정약종은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후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되었는데, 이는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훌륭하여 18년 동안 유배 생활 동안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4. 정약용의 유배와 가족, 그리고 마지막 시절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을 통해 가족과의 연결, 외가의 영향, 그리고 험난한 정치적 환경에서의 고난과 업적을 남겼다.

    강진은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특히 외가의 장서량이 훌륭하여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로, 해남에 있는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세웠다. 이 집안은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은 이안묵이라는 강진현감의 존재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자 이하술의 손자로, 서학의 추종자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그를 냉혹하게 대우했다. 재임 3년 동안 정약용은 힘들게 지내야 했고, 이안묵의 토색질과 탄핵당함, 대혼저지기 사건 등으로 정약용은 더욱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다.

    18년 동안의 오랜 유배 생활 동안 정약용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았고, 노론 벽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평지풍파로 인해 정약용의 유배는 석방되지 않았다. 아들들은 가끔씩 석방을 위해 격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정약용의 죄안 삭제 시도 역시 도리어 공격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의 편지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18188,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고, 1836222일에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특이하게도 그의 사망일은 60주년 결혼 기념일이었다. 정약용이 사망한 후 2년 후에 결혼한 부인 홍씨도 그를 떠났다.

    1910820, 대한제국 멸망 9일 전, 조정에서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약용은 정조와 소울메이트로 불릴 정도로 두 사람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정조 사후에도 정약용은 박해를 받았지만, 정조의 증손자 헌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환경이 변화하게 되었다. 헌종은 개혁 군주로서 김정희, 조병헌과 같은 개혁 성향의 선비들을 데려와 개혁을 추진하였다. 어떤 일설에는 정약용이 죽은 줄 모르고 벼슬을 다시 제수하려 했지만, 죽은 것을 알고 슬퍼한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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