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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

마스터지 2025. 2. 5.

근초고왕, 백제 전성기를 이끈 제13대 왕의 업적과 정치, 외교 활동


백제 역사상 가장 전성기를 누렸던 왕 중 한 명인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제13대 백제 왕으로, 346년부터 375년까지 30년간 재위하며 백제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국내 정치 체제를 안정시킴과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백제의 위상을 알린 인물이다. 이번 글에서는 근초고왕의 생애와 왕위 계승 과정, 내치(內治)와 정복활동, 그리고 외교 정책까지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근초고왕(해양교육포털)

근초고왕의 생애와 왕위 계승

 

재위 기간과 업적


근초고왕은 346년부터 375년까지 30년간 백제를 다스리며, 남쪽으로는 마한 세력을 통합하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북쪽에서는 대방군과 낙랑군 일부 지역을 확보하고, 평양성까지 진출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근초고왕 치세에 백제는 전성기를 맞으며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게 된다.

백제의 시작(해양교육포털)

가계와 왕위 계승의 독특한 양상


근초고왕은 조고왕(照古王) 또는 초고왕으로도 전해지며, 『진서(晉書)』에는 ‘여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진씨이며 그의 아들은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이다.

 

백제 왕위 계승은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7)부터 근초고왕에 이르기까지 초고계와 고이계가 번갈아 왕위를 차지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분서왕은 고이계 왕으로 계승되다가, 그 후 비류왕(초고계)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비류왕 사후에는 분서왕의 맏아들인 고이왕계 계왕(契王, 재위 344346)이 잠시 즉위했으나, 3년 만에 사망하면서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된다.


이후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이 지속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초고계에 의한 단선적인 왕위 계승 체계가 확립되었고, 이는 왕권 안정과 귀족이 아닌 왕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기반이 되었다.

 

근초고왕의 내치와 왕권 강화

 

천지 제사를 통한 정통성 확립


근초고왕은 즉위 후 첫 정월에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천지(天地) 제사를 올림으로써,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에 대한 확신을 내보였다. 이 제사는 초고계 왕으로서 백제 내에서 왕권을 굳건히 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었다.

 

귀족 숙청과 정치 체제 정비


근초고왕은 유력 귀족인 진씨 가문을 왕비로 맞아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졌다. 366년에는 왕후의 친척인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에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와 숙청 작업을 진행하며 귀족 세력에 맞서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이후 3년부터 20년까지 기록상 공백기가 존재하는데, 이 기간 동안 왕권 강화를 위한 내치 조치와 통치체제 정비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은 근초고왕이 대외 정복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근초고왕의 정복활동: 남진과 북진의 두 축

 

남쪽 정복 활동 – 마한과 가야 지역 진출


근초고왕은 남쪽으로 마한의 잔여 세력을 통합하고,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마한 정복 관련 기사가 자세히 실려 있지 않으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통해 근초고왕이 마한 지역에 대해 적극적인 정복활동을 펼쳤음을 추정할 수 있다. 369년에는 백제와 왜군이 협력하여 가야의 7국을 평정하며, 전남 해안지역까지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북쪽 정복 활동 – 고구려와의 치열한 전쟁


근초고왕은 남쪽에서 안정된 기반을 다진 후, 북쪽으로도 영역 확장을 시도하였다. 371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을 공격하자,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 373년에는 고구려가 다시 침입하자, 패하가에 매복하여 급습, 승리를 거두고 태자와 함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 전투를 통해 백제는 대방군과 낙랑군 일부 지역을 확보하며 북쪽 영역을 확장하였다.

 

요서지역 진출과 동아시아 국제무대의 부상


근초고왕 치세에는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요서경략설에 따르면, 백제는 위진남북조 분열 시기를 틈타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 고구려 견제 및 교역 거점 확보를 모색하였다. 또한, 백제의 외교적 성공은 후대 동진과의 공식 외교 관계 수립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근초고왕 치세의 대외 전략과 위상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된다.

4세기 백제(에듀넷)

근초고왕의 외교 – 동진 및 왜와의 활발한 교류

 

동진과의 공식 외교 관계 수립


372년, 근초고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내며 공식 외교 관계를 맺었다. 동진은 같은 해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로 책봉하며 백제의 외교적 지위를 인정했다. 이후에도 백제는 꾸준히 동진과 사신 교류를 이어갔으며, 이는 근구수왕 대에도 계승되었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왜와의 문화 및 군사 교류


근초고왕은 왜(일본)와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왜에 칠지도(七支刀)를 보내거나, 『논어』와 『천자문』과 같은 선진 문물을 전해주며, 문화적 교류와 군사적 협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당시 백제와 왜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일본 유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인물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칠지도

근초고왕 치세의 의의와 후대에 미친 영향

 

정치적 안정과 왕권 강화


근초고왕은 내치와 왕위 계승 체제를 안정시킴으로써, 귀족 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왕실 자체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은 대외 정복과 확장에 필요한 기반을 마련했고, 이후 백제 왕조가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외 정복 활동과 백제의 전성기


남쪽으로 마한과 가야, 북쪽으로 고구려를 상대로 한 승리는 백제의 영토 확장과 전성기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근초고왕 치세에 백제는 전남 해안지역부터 평양성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백제는 국내외 정치, 군사, 외교 분야에서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의 위상 제고


동진과의 공식 외교 관계 수립, 그리고 왜와의 문화 및 군사 교류를 통해 백제는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의 외교 정책은 백제의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문화적, 정치적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마치며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가장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정치적 안정을 통한 내치 강화, 대대적인 정복활동, 그리고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의 외교적 성과를 남겼다. 그의 치세는 백제가 단순히 한반도의 국가에 머무르지 않고, 요서지역과 왜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중요한 전환점이다. 근초고왕의 업적은 후대 백제 왕조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전반에 걸쳐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평가된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정치, 군사, 외교 분야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며 국가의 전성기를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다. 그의 내치 강화와 안정된 왕위 계승 체계, 그리고 대외 정복 및 활발한 외교 활동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오늘날에도 근초고왕의 업적을 통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보고,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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