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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과 2차 거란의 고려 침입

마스터지 2025. 1. 20.

고려 목종 12년 강조의 정변, 현종 즉위와 2차 거란 침입의 서막

 

1009년(목종 12년)은 고려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이 해, 서북면을 지키던 강조(康兆)가 국왕 목종(穆宗)을 시해하고 새로운 국왕 현종(顯宗)을 옹립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정변은 목종의 후계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일어나 예기치 않게 전개되었으며, 이후 거란의 침입으로 이어지는 2차 거란 전쟁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목종대의 정치 상황, 강조의 정변, 그리고 그 여파로 발생한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강조역(KBS 고려거란전쟁)

목종 대의 정국과 후계 선정 문제

 

목종 대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세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5대 국왕 경종(景宗)의 맏아들 왕송(王誦)은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2세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경종은 사후에 자신의 사촌형제인 22세의 왕치(王治)를 대신하여 왕위를 물려주었고, 그는 바로 제6대 국왕 성종(成宗)입니다. 성종은 자신의 조카 왕송을 개녕군(開寧君)으로 책봉하여 궁궐에서 기르며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997년(성종 16년)에 성종이 사망할 때, 왕송은 18세의 나이로 제7대 국왕 목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목종은 12년 동안 국왕으로 재위하며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힘썼습니다. 관료와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서경(西京)을 호경(鎬京)으로 개칭하였으며, 지방관의 조직 체계를 손질하였습니다. 또한 북방 지역에 많은 성을 쌓아 여진의 노략질을 막고 국가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목종 대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여 그의 통치 활동을 자세히 추적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의 깊은 정치 관여입니다. 목종이 18세에 즉위했을 당시, 이는 고려 초의 국왕들이 대개 20~30세에 즉위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나, 천추태후는 자신의 외가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손을 잡고 정정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김치양은 성종 대부터 천추태후와 정을 통하고 있었으나, 성종 시절 장형(杖刑)에 처해 귀양을 간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조정에 복귀하여 천추태후와의 결탁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동주(洞州)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고, 궁성에 시왕사(十王寺)를 건립하며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이들은 목종의 후계자로 자신의 아이를 세우려 했으나, 고려의 왕통을 이어받는 정통성을 가진 대량원군 왕순(王詢)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왕순은 태조 왕건의 손자로서 가장 순혈의 왕족이었으며, 천추태후와의 정략 결혼을 통해 왕건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왕순이 목종 사후의 왕위계승자로 지목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천추태후는 그를 절에 머물게 하며 정치적 견제를 가했습니다.

 

KBS 고려거란전쟁에서 강조의 정변에 대해서 잘 보여줍니다.

 

정변의 발생과 강조의 권력 장악


목종의 후계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이 시점에서 궁궐에 크게 불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는 목종에게 큰 충격을 주어 병을 앓게 했습니다. 목종은 자신의 측근들을 소환하여 후계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목종은 신임하는 신하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두 통의 문서를 내놓았습니다. 하나는 발해 출신의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것으로, 김치양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왕순이 올린 것으로 자신을 독약으로 죽이려는 시도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채충순은 이를 보고 대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목종이 왕순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채충순과 최항(崔沆), 유충정, 고영기(高英起) 등은 왕순을 궁궐로 맞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에게 소수의 군사를 보내 왕순을 개경으로 데려오도록 지시하였고, 서북면순검사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호위를 맡기려 했습니다. 이러한 신속한 조치에 김치양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강조는 목종의 명을 받아 군을 일으켰으나, 이후 목종이 이미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는 위종정(魏從正)과 최창(崔昌)이라는 관리들이 강조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강조는 목종이 사망했다는 정보를 믿고 다시 군을 개경으로 진격하게 되었고, 이는 정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새 국왕으로 왕순을 옹위하려 했습니다. 그는 간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왕순을 궁궐로 데려와 현종으로 즉위시켰습니다. 목종은 폐위된 후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내려가게 되었고, 이후 목종은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강조는 권력을 장악하며 고려의 정정을 휩쓸었습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강조가 목종을 배신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영상입니다.

 

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과 강조의 몰락


정변 이후 강조는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은대(銀臺)와 중추원(中樞院), 남북 선휘원(宣徽院)을 폐지하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하여 자신이 중대사(中臺使)를 맡았습니다. 이를 통해 국왕의 측근 기구를 통폐합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목종의 궁녀를 내보내고, 정자를 헐고 진귀한 짐승들을 풀어주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거란에도 사신을 보내 현종의 즉위를 알리고 화의를 맺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1010년(현종 원년)부터 거란이 고려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를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거란은 994년(성종 13년)에 화의를 맺은 이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목종 대의 정변으로 인해 상황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려의 국왕 교체가 거란에 알려지면서 이를 대역(大逆)으로 규정하고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했습니다. 결국 1010년 11월, 거란의 황제 성종이 이끄는 40만의 대군이 고려로 침입하게 되었습니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초기에는 검차(劍車)를 활용한 전술로 거란군을 격파하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승리 후 방심한 강조는 거란군의 강공에 의해 본진이 함락되었고, 강조와 그의 부하 장수들이 대거 사로잡히거나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항복을 권유했으나, 강조는 고려인의 신분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다가 처형당했습니다. 이로써 강조는 고려의 권력을 잃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강조 정변의 역사적 평가와 여파


강조의 정변은 고려 역사에 단기적인 혼란을 가져왔으나, 장기적으로는 2차 거란 전쟁의 발발로 이어지며 동북아시아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강조의 정변은 예정된 왕위 계승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현종의 즉위는 강조의 정변 없었다면 이미 예정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왕위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거란의 침입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고려의 정치와 군사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은 고려가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다시금 국력을 재정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강조의 몰락과 함께 그의 측근들도 처벌을 받아 정계에서 제거되었고, 변경된 관제도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고려가 내부의 혼란을 극복하고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강조의 정변은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고려의 정치적 구조와 외교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이로 인해 고려는 이후 거란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강조의 정변은 단기적인 혼란을 넘어, 장기적인 국가의 방향성과 외교 전략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1009년 강조의 정변은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위협이 맞물려 국가의 운명을 크게 좌우한 사건입니다. 목종의 후계 문제를 둘러싼 권력 투쟁은 예상치 못한 정변으로 이어졌고, 이는 거란의 침입으로 이어지는 2차 거란 전쟁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조의 몰락과 현종의 즉위는 고려가 내부의 혼란을 극복하고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교훈을 주며, 국가의 안정과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고려 목종 12년의 정변은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권력의 변화가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또한,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단결과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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