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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숨겨진 영웅 양규, 거란군을 뒤흔든 공격

마스터지 2025. 1. 30.

거란의 침공과 고려의 위기와 숨겨진 영웅 양규


10세기 말, 북방 초원의 패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와 대립하며 동아시아 패권을 노렸습니다. 고려는 993년 1차 전쟁 후 강화를 맺었지만, 1010년 거란 성종의 4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오며 2차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습니다.

 

  • 여진족 학살 사건: 고려 관리 하공진·유종의 동여진 부족 공격
  • 강조의 정변: 목종 시해 후 현종 옹립

 

거란은 '역적 토벌'을 명분으로 고려를 침공했고,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 30만이 궤멸되며 개경이 함락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KBS 고려거란전쟁 양규역 지승현

양규, 서북면에서 피어난 불꽃 같은 활약


첫 번째 시험대: 흥화진 방어전


양규는 거란군이 최초로 마주친 고려 장수였습니다. 흥화진 도순검사로 부임한 그는 700명의 수비군과 함께 성을 사수하며 거란 성종의 회유 공세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나는 왕명을 받았을 뿐,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고려사』 양규 열전 중

 

 

기적의 유격 작전


주력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양규는 1,700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기동전을 펼쳤습니다.

 

  • 1010년 12월 16일: 곽주 기습으로 6,000 거란군 섬멸
  • 1011년 1월: 무로대·이수·석령 등지에서 7전 7승
  • 3만 명의 포로 구출: 매 전투마다 평민 구조 기록

고려의 이순신이라는 칭호를 받는 양규장군의 전쟁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전투: 애전에서의 최후


1011년 1월 28일, 양규는 거란 선봉대 1,000명을 섬멸했으나 본대와 조우했습니다. 종일 혈전 끝에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그는 검을 들고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적을 격파했으나, 고슴도치 털처럼 화살을 맞아 전사하니..."
문종이 내린 추모 교서 중

 

양규장군의 마지막 전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가 숨겨둔 전략적 의미

 

철군로 차단 작전


양규의 유격전은 단순한 저항이 아닌 전략적 타격이었습니다.

 

  • 거란군 보급로 차단
  • 철군 시기 지연으로 고려군 재정비 시간 확보
  • 포로 약탈로 인한 경제적 피해 최소화

 

심리전의 승리


개경 함락 후 고려군의 사기가 떨어진 상황에서, 양규의 연전연승은 국민적 저항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이는 이후 3차 전쟁인 귀주대첩(1018년)의 승리 토대가 되었습니다.

 

문신에서 무장으로, 양규의 이중적 정체성


흥미로운 점은 양규의 신분입니다. 전쟁 전 그는 형부낭중(법무부 관리)으로 순수 문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술은 당대 최고의 무장을 압도했습니다.

 

  • 지형 활용: 험준한 서북면 지형을 이용한 매복전
  • 정보전: 거란군의 동향을 민간인 네트워크로 사전 탐지
  • 심리전: 야간 기습으로 적 사기 저하

 

현종이 눈물 흘린 추모


전후 현종은 양규에게 공부상서(정2품)를 추증하며 특별 포상을 내렸습니다.

 

  • 가족 보상: 아들 양언례에 관직 세습
  • 매년 100석 쌀 지원: 유족 생계 보장
  • 공신각 초상화: 왕실 최고 영예

 

이후 양규 가문은 6대 동안 13명의 고관을 배출하며 명문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양규가 남긴 역사적 유산

 

전술적 교훈

 

  • 약자는 유격전으로 강적 상대 가능
  • 지역 주민 지원이 승패 결정

 

현대적 재해석


군사 전문가들은 양규의 전략을 "10세기형 특수부대 작전"으로 평가합니다. 2023년 국방연구원 보고서는 그의 전술을 현대 비대칭전 교범에 포함시켰습니다.

 

양규를 찾아가는 여행

 

  • 양규 장군 묘: 경북 영주시 풍기읍
  • 흥화진 유적: 평안남도 영유군 (북한 지역)
  • 공신각 복원 모형: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흥화진

양규에 대해 꼭 알아야 할 3가지


Q. 왜 역사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나요?
A: 조선 시대 사관들이 유교적 왕권 강화 논리에 밀려 소외되었지만, 2015년 검정 교과서부터 재조명 중입니다.

 

Q. 실제로 3만 명을 구출했을까요?
A: 『고려사절요』와 『거란국지』 모두 구출 기록이 있으나, 당시 인구로 보아 1만 명 내외로 추정됩니다.

 

Q. 현대 군사전략에서 배울 점은?
A: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확인된 "약자의 유격전+정보전" 조합이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했습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이름


양규는 패배가 예상되던 전쟁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켰습니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고려는 강동6주를 잃고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을 겁니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린 그의 초상화는, 위기 앞에서 지식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영웅은 조용히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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