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위만 이야기, 중국에서 넘어온 위만은 어떻게 왕이 됐을까?
위만 조선 이야기
고조선의 새로운 국면을 연 위만(魏滿)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역사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위만은 단순한 망명자가 아니라,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찬탈한 인물로, 그의 후손들이 다스린 시기를 ‘위만 조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위만의 이름, 출신 논란, 그리고 그가 어떻게 망명자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고조선을 번영으로 이끈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위만의 이름과 기록
역사 속 위만은 여러 사서에 등장하지만, 그의 이름 표기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많습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사기(史記)』에서는 그를 ‘조선왕 만(滿)’으로만 칭할 뿐, 구체적인 이름 표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후 후한대의 『잠부론(潛夫論)』에서는 처음으로 ‘위만(魏滿)’이라는 표기가 등장하였고,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에서는 ‘위만(衛滿)’으로도 기록됩니다. 우리나라 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역시 ‘위만(魏滿)’으로 표기하고 있어, ‘위’가 성인지 이름의 일부인지, 또 어느 한자의 ‘위’인지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 중입니다.
썬킴의 위만 조선이야기입니다.
위만의 출신에 대한 논란
위만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각이 존재합니다. 『사기』에 따르면 그는 옛 연(燕) 나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 무리 천여 명과 함께 북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위만이 순수한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 계통의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망명 시 옷차림이 오랑캐 복식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고조선계라고 결론내리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망명이라는 정치적 상황에서, 위만이 현지의 풍습과 복식을 수용하여 자신을 현지인처럼 보이게 한 전략일 가능성도 충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같은 시기 조타(趙陀)와 비교해도, 조타는 명백한 한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맞게 복식을 변화시킨 사례가 있어, 위만의 출신에 대해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망명자에서 왕으로, 위만의 권력 장악
고조선은 이른 시기부터 연나라와 대립하며 스스로 왕을 칭했지만, 연나라의 공격과 내외부의 혼란 속에서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의 공격으로 서쪽 영토를 잃은 후, 부왕(否王)과 그 아들 준왕(準王)은 진나라의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많은 중국인 유이민들이 고조선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준왕은 이들을 나라 서쪽에 머물도록 허용했습니다.
한나라가 건국된 후, 연왕 노관(盧綰)이 정치적 이유로 흉노로 망명하면서 위만 역시 한나라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위만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였던 패수를 건너 망명하며, 자신이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지킬 수 있도록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준왕은 위만의 제안을 수용하고 그에게 박사(博士)라는 지위를 부여하며 100리의 땅을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단순한 수호자가 아니라, 점차 중국의 유이민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위만은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 군대가 열 갈래로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왕궁으로 가 왕을 보호하겠다고 속인 후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결국 준왕은 위만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치게 되었고, 위만은 고조선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위만의 외교 정책과 고조선의 번영
왕이 된 위만은 자신이 이끈 국가를 단순한 정복국이 아닌, 중국에서 온 유이민 집단과 토착 집단이 공존하는 연합 정치체로 재구성했습니다. 위만은 기존의 고조선 토착 세력을 효과적으로 포섭하기 위해 ‘조선’이라는 국명을 유지하면서, 상(相)이라 불리는 수장들을 통해 각 자치체를 통합하고 관리하였습니다.
또한, 한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도 위만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한나라로부터 외신(外臣)으로 인정받으며, 동이 종족들을 제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막대한 재화를 획득하는 등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로 인해 고조선은 주변의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같은 세력들을 포섭하며, 그 영향력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는 번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위만은 단순히 망명한 외국인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민하게 상황을 이용하여 고조선의 왕이 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과 출신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위만이 이끈 고조선은 중국 유이민과 토착 집단이 어우러진 독특한 정치체제로 발전하며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위만의 행보와 정책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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