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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 전형필은 한국 문화유산의 수호자

     

    1935년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한 청년이 일본인에게 거액을 건네며 고려청자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구입했습니다. 이 청년이 낸 돈은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 20채를 살 수 있는 2만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바로 조선의 전설적인 문화재 수집가이자, 보성 중고등학교의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입니다. 그는 이 거액의 돈을 주고 구입한 청자를 다시 되팔아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지만,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단순한 재산가의 기벽이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간송 전형필의 삶과 문화재 수집

     

    1. 간송 전형필의 유년기와 배경

     

    간송 전형필은 1906년 경성에서 최고의 부잣집 중 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종로의 상권을 장악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방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간송은 1929년, 스물세 살의 나이에 부친이 별세하면서 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당시 그가 상속받은 재산은 논만 해도 총 800만 평 이상, 연간 수익만 해도 15만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그는 단순히 앉아만 있어도 수십억 원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자산가였습니다.

     

    그러나 간송은 이 엄청난 재산을 개인의 향락이나 사치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간송은 1930년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서화와 도자기, 고문서 등을 수집하며, 조상들이 남긴 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2. 비웃음을 딛고 문화유산을 지키다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대해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재산을 낡은 그림 쪼가리와 그릇, 너덜너덜한 책을 사는 데 탕진한다"는 비아냥이었지요. 그러나 간송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특히 그는 단순히 유물을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유물들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에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간송은 자신의 수집품을 혼자만 소유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1938년 한국 최초의 사설 박물관인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문화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그 가치를 지키고 후세에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어학회 회원

    3. 간송의 신념은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

     

    간송 전형필은 자신의 신념을 글로 뚜렷하게 밝힌 적은 없지만, 그의 삶과 수집한 문화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깊이 사랑했으며, 나라가 언젠가 독립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독립된 나라의 자존심은 전통문화와 문화재에 있다고 믿었고, 이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간송의 이러한 신념은 그가 수집한 유물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간송이 수집한 명품 문화유산들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들 유물은 간송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산들입니다.

     

    1. 신윤복의 '미인도' (보물)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시대 말기의 대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작품으로, 조선 시대 인물화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이 작품은 갸름한 얼굴에 그윽한 눈매, 세련된 저고리와 풍성한 쪽빛 치마 등 여인의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미묘한 분위기와 완벽한 구도는 이 작품을 '조선의 모나리자'라 불리게 합니다.

    2. '혜원전신첩' (국보)

     

    '혜원전신첩'은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 30점을 모은 책으로,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단오풍정'과 같은 작품들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국사 교과서와 다양한 매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한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간송이 거액을 주고 되찾아왔습니다.

    3. '해악전신첩' (보물)

     

    '해악전신첩'은 조선 후기의 대가 겸재 정선이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동해안 일대를 그린 21폭의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한때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땔감으로 사용될 뻔했으나, 간송이 골동품상을 통해 구입하면서 간신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4. '마상청앵' (보물)

     

    '마상청앵'은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선비의 표정과 자연스러운 풍경 묘사는 김홍도의 뛰어난 화풍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김홍도가 평생을 걸쳐 도달한 예술적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걸작입니다.

    5. '촉잔도권' (보물)

     

    '촉잔도권'은 심사정이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비유한 8m에 달하는 길이의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간송이 5000원에 구입한 뒤 6000원을 들여 복원한 것으로, 당시의 구입비와 수리비를 감안하면 총 수십억 원에 해당하는 비용이 들었습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6.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로, 그 형태와 색, 정교한 무늬가 모두 완벽한 우아함을 자랑합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1935년 일본인 골동품상에게서 2만 원에 구입했습니다. 일본인 골동품상이 두 배의 가격을 제안했지만, 간송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했습니다.

    7.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국난국문병' (국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국난국문병'은 18세기에 만들어진 백자로, 예쁘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이 백자는 다양한 색을 사용하고 입체감을 더해 조선시대 백자 중에서도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경매에서 구입하기 위해 일본 골동품 상인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결국 1만4580원을 지불하고 획득했습니다.

     

    8.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국보)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은 12세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연적(먹을 갈 때 물을 붓기 위해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새끼를 품고 있는 원숭이의 모양이 귀엽고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포함한 20점의 고려청자를 영국인 존 개스비의 소장품에서 일괄로 구입했습니다.

    9.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국보)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은 삼국시대인 563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높이 17.7cm에 불과하지만 정교하고 화려한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거액을 지불하고 구입하였으며,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10. '금동삼존불감' (국보)

     

    '금동삼존불감'은 불감(불상을 모시기 위해 작은 규모로 만든 건축물 모형) 안에 불상을 모셔 놓은 정교한 작품입니다. 불감 안의 불상을 바라보면 실제 불당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사기 위해 당시 거액인 15만 원을 지불했습니다.

     

    11. '훈민정음해례본' (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해례본'은 간송의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로,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3년 뒤인 1446년에 발간된 책입니다. 이 책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간송은 이 책을 안동에서 발견해 1만1000원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간송은 이 유물을 6·25전쟁 당시에도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간송 전형필의 유산과 그 후

     

    1. 간송의 유산을 지켜낸 후손들

     

    간송 전형필은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문화재 수집을 멈췄습니다. 이미 재산의 상당 부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유물이 해외로 유출될 걱정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1962년 56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후손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문화유산을 지켜냈습니다.

     

    간송의 아들 전영우 전 간송미술관장은 간송이 수집한 유물을 조사하고 정리한 후, 아버지가 설립한 간송미술관을 대중에게 개방했습니다. 현재의 전인건 관장은 3대째 간송의 유산을 지키고 있으며, 유물 보존과 연구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2.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첨병역할

     

    간송이 남긴 유산은 간송미술관을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국보급 유물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들 유물은 대중에게 전시되어 우리 문화재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은 간송이 수집한 주요 유물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간송 전형필, 한국 문화유산의 영원한 수호자

     

    간송 전형필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오로지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사용하며, 수많은 국가적 보물들을 우리 땅에 남겼습니다. 그는 단순히 재산가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고, 한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그 뜻을 이어받아 간송미술관을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간송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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